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제1공화국 (문단 편집) === 공포 정치 === 공화국이 세워졌지만, 프랑스는 내우외환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. 특히나 [[수도(행정구역)|수도]]인 [[파리(프랑스)|파리]]는 식량이 부족해서 '빵을 달라'는 요구와 함께 [[1792년]]에서 [[1793년]]으로 넘어가는 겨울 내내 식량 소요 사태가 끊이지 않았을 정도. 한편 외부세력과의 전쟁 역시 계속되었고 이에 [[1793년]] [[4월]] 국민 공회는 공안 위원회(Comité de salut public)라는 행정부서를 조직하여 치안을 유지하고자 시도한다. 이 공안위원회를 이끄는 사람은 바로 급진세력의 거두인 [[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]]였다. 혁명의 이름으로 국가의 적으로 인식된 자들은 줄줄이 [[단두대|기요틴]] 앞으로 끌려가기 시작했고, 공안위원회는 공포 정치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된다. [[로베스피에르]]와 급진세력이 주도한 [[공포정치]]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[[프랑스 혁명/진행 과정#s-4.10|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]]와 로베스피에르 항목의 [[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#s-5|공포정치]]를 참조하자. 다만 이 시기에 [[인권]]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. 바로 [[1793년]] 최초의 프랑스 공화국 헌법이 발효된 것. [[1789년]] 발표된 [[프랑스 인권 선언]][* 정식 명칭은 Déclaration des droits de l'Homme et du citoyen으로, [[인간]]과 [[시민]]의 권리 선언이라는 뜻이다.]을 기본으로 하여 21세 이상 성인 [[남성]]들의 보통선거권과 더불어 '[[주권]]은 [[인민]]에 속한다'는 내용의 재민주권을 확인한 이 [[헌법]]은 이후 전 세계 [[헌법]]의 모태가 된다. 또한 이 시기 [[프랑스 공화력]]이라고 불리는 ~~비효율적인~~ 역법 개혁 및 [[반가톨릭]] 운동도 수반됐다. [[교회]]와 종교 기념물이 파괴되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[[잔 다르크]] 관련 문화재까지 화를 면치 못했다.[* 다만 원체 [[가톨릭]]이 [[프랑스인]]들의 삶에 뿌리 깊게 스며들었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정부의 [[반가톨릭]] 운동에 엄청난 반발을 일으켰다. 방데에서는 [[방데 전쟁]]이라는 대규모 봉기까지 일어났을 만큼 가톨릭 탄압의 실제 효과는 미미했으며, [[나폴레옹]]이 [[황제]]에 오르면서부터는 [[교황]]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[[가톨릭]]을 적극적으로 포용한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